잡식성 책 읽기/Christianity

헤아려 본 슬픔

choijeo86 2021. 11. 30. 21:41

2021.11.30 헤아려 본 슬픔 (C.S.Lewis) Link

 

내키는대로, 대중없이, 손에 잡히는대로, 읽고 싶은 만큼, 책들을 읽고 있다. 굳이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 없다. 읽기 시작한 책을 기간 내에 다 읽어야 하는 숙제도 없다. 다만, 마치 헌책방의 중고책 "수학의 정석"들이 대개 집합론 부분만 손때가 묻어 있듯, 계속 책들을 앞에만 좀 읽고 던져 두지는 말아야겠다. 물론 그렇게 읽어도 책 읽은체 하는데는 문제 없다. 

 

어제 H 박사님이 (교회다니시는 독실한 분이시다.) 내 연구실에 놀러 오셔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함께 훑다가 C.S.루이스의 책들을 보시고는 잠시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래서 오늘 퇴근하고서 무얼 좀 읽어볼까 하다, 두께도 얇고 가볍기에 이 책을 가방에 넣고 퇴근했다. 

 

PS. 아래의 인용에서 일부 용어는 가톨릭에서 쓰이는 단어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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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by 메들린 렝글)

 

- 40년에 이르는 나의 결혼생활에 비하면 그가 경험한 결혼이란 단지 맛을 본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결혼이라는 성대한 피로연에 초대되었으나, 미처 전채를 끝내기도 전에 무자비하에 진수성찬을 빼앗긴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이스는 그 급작스러운 상실 때문에 짧은 기간이나마 믿음을 상실하기도 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다른 모든 도움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는 문"

 

- 어떤 비극에 대해서든지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루이스처럼 경악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 피조물들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믿음 있는 이들에게 죽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이들에 대해 참을 수 없어 한다. 그의 성마름은 믿음이 얼마나 강하건 우리 대부분이 느끼는 감정이다. 

 

- "내게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라고 루이스는 썼다. 왜냐하면 진정한 종교적 위안이란 장밋빛으로 아늑한 것이 아니라, '힘을 싣다'라는 단어 com-fort의 원래 의미 그대로 '힘을 돋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또한 루이스가 성난 목소리로 하느님께 고함지르고 회의하고 발버둥치며 대들 용기가 있었던 사실에 감사한다. 이는 자주 권장되지는 않지만 건강한 슬픔의 일부이다. 루이스처럼 저명한 기독교 변증론자가 그토록 탁월하게 주장해 온 믿음을 의심할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자신의 회의와 분노와 고뇌를 터놓을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영적 성장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1장

 

-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 불행한 인간은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일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 자신으로부터 끄집어 낼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신이 피로한 사람이 추운 날 담요 한 장 더 얻자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일어나 이불을 찾아다니느니 차라리 떨며 누워 있는 쪽을 택할 것이다. 외로운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으로, 마침내는 더럽고 역겨운 인간으로 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 그런데 하느님은 어디계시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증상이다. ...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 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주시는데 인색한 것인가?

 

- 이러한 생각들을 C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그는 똑같은 일이 그리스도에게도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나도 아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문제가 더 쉬워지는가? 

 

- 물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때에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 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해버리면 매우 간단하다. 솔직히 말하자.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분을 부르지 않을 때에는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 대답은 없다. 그저 잠긴 문, 철의 장막, 텅 빈 허공, 절대적인 무의 세계만 있을 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구하다니 내가 바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확신이 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나 자신의 기도에 의해 생긴 자기 최면일테니.

 

 

2장

 

- 그녀가 죽은 지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 이미 내가 생각하는 그 H는 점진적이고도 은밀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더 상상속 여인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 결혼이 내게 주었던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이처럼 아주 가깝고 친밀하면서도 언제나 확실하게 '내가 아닌 남'이며 순종적이지 않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어떤 것의 영향력을 계속 느끼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한데 그 모든 작용이 이제 무위로 돌아가는 것인가? ... 오 하느님, 하느님이시여. 제가 다시 껍질 속으로 기어서 돌아갈 운명이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운명이라면 왜 이 피조물을 그 껍질에서 나오도록 애써 끌어내셨나이까?

 

- 나는 언제든지 다른 죽은 사람들을 위해 어느정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H를 위해 기도하려고 하면 멈칫 한다. 혼란과 어리둥절함에 휩싸인다. 나는 그녀가 이제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섬뜩할 정도로 느끼고 있으며, 텅 빈 진공에다 대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H가 죽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과거의 일부이다. 과거는 과거이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간 그 자체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며, 천국이란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주면 순종해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 라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 물론 당신이 순전히 지상의 용어로 그려진 '요단 강 건너' 가족의 재회 등에 대해 모두 글자 그대로 믿고 있다면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으며, 덜떨어진 찬송가나 석판화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말씀이 한마디도 없다. 듣기에도 거짓되게 들린다. 

 

- 만약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잃었음을 슬퍼하지 않고 그 아이가 무엇을 잃어버렸나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면, 죽은 아이가 자신이 창조된 목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이 위안이 된다. 또한 그녀 스스로 단 하나의 자연스러운 행복을 잃었으면서도 더 위대한 것 ("하느님을 경외하며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위안이 된다. 하느님을 향한, 그녀 내면의 영원한 영혼에는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 됨에는 위안이 되지 못하리라. 특히 어머니로서의 행복은 지워야만 하리라. 어느곳 어느때에도 그녀는 다시 무릎 위에 아이를 올려놓지 못할 것이며, 목욕시키지도,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아이의 미래를 계획하지도, 손주를 보지도 못하리라. 

 

-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걸까? .. "왜냐하면 이제 하느님의 품안에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느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인가? 하느님의 선하심이 일관성 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승의 삶에서 그분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한,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것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 일관성 있게 고통을 주시고자 한다면, 죽은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주실 수 있으리라. 

 

- 하느님이 '선한 분'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절망적인 희망사할일 뿐, 그 밖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모든 명백한prima facie 증거는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한 반론을 펴기 위한 증거라도 우리에게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 반대되는 증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착각하신 것이라면? 

 

- 기도하고 소망할 때 마다 목이 메는 것은, H와 내가 드렸던 기도와 우리가 가졌던 헛된 소망을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 한걸은 한걸은 우리는 '동산의 길을 걸어 올라갔다.' 하느님은 가장 자비로운 듯 보일 때마다 실은 다음 번 고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3장

 

- 내가 언제나 H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일도 해야 하고 사람들과 대화도 나눠야 하는 덕분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쩌면 H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가 최악의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이유없이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생각, 무언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는 생각이 퍼져 간다. ...

 

- 그런 것이었다. 마가목 열매가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을 보는 순간 왜 하필이면 그것이 우울하게 보이느냔 말이다. 괘종시계를 들으면 그 소리에 항상 있었던 어떤 특징이 빠져 나가고 없다. 세상이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남루하고 닳아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게 왠일일까? 아, 알겠다. 

 

- 나는 세속적인 행복에 기대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바 있었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심지어 고난 겪을 것을 약속받은 처지 아니던가. 그것은 예정된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라는 말을 듣기조차 하였으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리 생각하고 계산해 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 만약 내 집이 일격에 붕괴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상상일 뿐이다. 이들을 계산에 넣는 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다. 내가 만일 세상의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였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쳐 왔을 때 이처럼 압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 속 내 믿음은 '질병' '고통' '죽음' '외로움' 등으로 이름 붙여진 가짜 돈으로 계산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

금방 쓴 글은 내가 치유 불능의 인간임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후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질문들의 연속)

 

 

 

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