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 읽기/Social Science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이창민)

choijeo86 2023. 1. 8. 21:57

지금 다시, 일본 정독 (이창민, 2022 Link)

 

- 연구소에 입사하고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받았다. 한일무역분쟁을 대상으로 논문을 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연구소가 '산업'연구원이니, 결국 내가 계속 보고 듣고 읽고 써야 할 것들은 '일본의 산업, 일본의 통상'이겠다.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받아들이는데까지 거의 반년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처음에는 많은 것들이 막막했는데, 하나씩 공부하고 알아 나가다 보니 이거 생각보다 흥미롭고 의미를 찾게 된다. 정리의 일본 답게 공개된 데이터, 문서들만 해도 양이 방대함에도 아직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내용도 많은 것 같다. 언어적 제약때문에 일본어에 능숙한 이들보다 시간이 좀 오래걸리는 문제는 있지만, 시간과 노력만 조금 더 들이면 못할 것도 없다. ('인도'라는 키워드를 받은 내 동료의 경우 언어적 제약은 적겠지만 반대로 자료가 부족해 어려워 한다. 아니, 회의 하는데 인도식 영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로 통역을 고용하는걸 보면 언어의 제약이 적은 것도 아닐 수도....)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에 한번도 안가고 이러한 명작을 남겼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내가 그 정도로 명작을 남길 것 같지는 않지만 그리고 난 일본 갈거고!,  모르는 것이 많기에 오히려 더 궁금하고, 알고 싶은게 많고,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힘'이 될 수 있다. 

 

- '일본'이라는 키워드를 받아들이고 나서 일본의 경제, 산업(그리고 더해서 일본사와 정치 등도)과 관련한 책들은 닥치는대로 구입했다. 그러나 이들 중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들, 즉 최근 일본의 경제와 산업구조에 대해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내용을 다루는 책들은 몇 권 찾지 못했다. 그 얼마 안되는 책들 중 이창민 교수님(Link)의 책은 흥미와 가독성, 내용의 객관성을 모두 잘 잡은 책이다.   

또한 저자의 전공이 경제사, 특히 제도경제학으로 이 분야를 잘 아시는 분이기에 나올 수 있는 특유의 통찰이 돋보인다. '일본은 이제 끝났다'는 식으로 무턱대고 깔보는 것도, 반대로 '한국은 여전히 일본을 못따라간다'는 식으로 숭상하는 것도 모두 피해야 할 일텐데, 저자는 이를 책 전반에 걸쳐 훌륭히 해내고 있다. 

 

- 여러 내용들 중 저자가 한일관계에 관련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마지막 장에 담겨 있다. 이들 중 개인적으로는 다음 대목, 우리의 위상이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음에도 아직 스스로 '장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장기판의 말'로 보고 있다는 대목에서 공감이 된다. 경제력은 선진국 수준에 들어섰을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수준은 아직 1990년대 산업화 시기의 끝자락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아직 우리에게는 이러한 큰 판을 읽는 연습이 부족하다. 메가 FTA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다. RCEP이나 CPTPP를 주제로 한 각종 회의에 참석해 보면 아직까지도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관세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상품 무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중국 시장에 우리 제품의 수출을 늘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일본에서 소재, 부품의 수입을 줄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반면 미국, 유럽, 일본이 메가 FTA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와 많이 다르다. 이들의 관심사는 새로운 통상 질서를 선도하고 안정적인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나라별로 통상전략을 비교해 보면 장기를 두는 나라와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나라들의 차이가 꽤 선명하게 드러난다." (책 319쪽에서 인용)

 

- 위 대목이 눈에 띈 이유는 지금 IPEF 협상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한국의 IPEF 참여를 가리켜 지역내 통상질서 수립 과정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거의 최초의 일이라는 식의 (약간은 상기된) 표현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 일본 등 전통 강국들 사이에서 우리가 새로운 통상 규범들을 제시하고 판을 이끌고 나갈 수 있을지, 그게 가능하겠냐는 식의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는 것 같다. 한국은 분명 이제 선진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산업화시대 후발추격자의 사고방식에 잡혀 있는, 그 둘 사이 어딘가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