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 읽기/Social Science

경제관료의 시대 (홍제환)

choijeo86 2024. 4. 22. 22:34

경제관료의 시대 (홍제환) Link

 

일단 평점부터 주고 시작하자.

재밌고 유익하다.

별 다섯개

 

- 보통 책을 살 때 책이 서점에 나오고 나서 6개월 뒤에 사는 편이다. 이유가 있는 것이, 알라딘에서 아마 새책을 팔았다 6개월 뒤에 바이백하는 옵션이 있는 모양이어서, 6개월 쯤 되면 많은 (거의 새 책인) 책들이 70% 정도의 가격에 중고 알라딘 서점에 뿌려진다. 읽고 싶은 책들이 있어도, 꼭 나온 직후에 정가 다 주고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6개월 기다렸다가 약간 싼 값에 중고로 줍줍하는 편이다.

 

- 근데 이 책은 제목과 목차를 보고 오 재밌겠다! 바로 읽자! 싶어서 그냥 새 책을 질러버렸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책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의 경제정책을 담당한 경제관료 13명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표지에 나오듯 (시기 구분이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 전후 재건기 (백두진, 송인상), 1960년대 도약기 (장기영, 김학렬, 양윤세, 황병태), 1970년대 질주기(최형섭, 김재관, 김정렴, 오원철, 남덕우), 1980년대 전환기 (신현확, 김재익)의 13명이다. 

 

- 우선 (전공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경제 정책 관료 한명 한명의 행적을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들을 알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예컨대 첫번째 인물인 백두진이 임시토지수득세를 도입해 전시 인플레이션 안정과 재정 확보를 동시에 도모한 점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 이러한 개별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주로 자서전, 회고록 등에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재밌는 썰들이 많긴 하지만) 자화자찬과 편향된 시각, 잘못된 기억 등에서 오는 객관성 문제는 한계일 수 밖에 없다. 경제사 전공자인 저자는 이러한 제약을 고려, 여러 교차검증을 통해 균형잡힌 서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대일청구권자금을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사용하는 아이디어에 대해 이 책에서는 박태준, 황병태 등의 자서전에서 각각 자신들이 제안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양윤세 당시 경제기획원 투자진흥관이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김학렬 부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인다고 평가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 13인의 경제 관료 중에는 두 명의 과학기술 관료인 최형섭, 김재관도 있다. 이들 중 서독에서 공학 박사를 받고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던 김재관이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방문했을 때 한국의 종합제철 계획안을 직접 제출했다는 대목,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몇 년 뒤 귀국해 포항제철 건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의 중화학공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대목이 매우 흥미롭다. (그 이전에 부총리에게도 제안서를 보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소위 서구 선진국에서 유학한 박사 한 명의 위상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높은 1960년대니까 가능한 이야기였겠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연구하고 생활하던 한 개인 연구자가 모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제철소 건립 계획을 만들고, 운좋게 그것을 국가 최고 지도자에게 제안해 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는 참 이색적이다.   

 

(최형섭은 예전에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서 자신이 대한중석 사장 시절 최형섭을 불러 연구소를 만들었고, 그것이 나중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모체가 되었음을 읽은 적이 있다. 장지량 장군 회고록이 좀 오류가 심하지만 이건 사실일 듯.)

 

- 내 소속 기관에 대한 얘기도 짧게 나온다. 원래는 중동 오일머니를 벌어오는데 기여하고자 연구소를 세운 것이 모체였다는 대목.

 

'남덕우는 중동 진출을 활성화하려면 중동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에게 중동문제연구소 설립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975년 12월 설립된 중동문제연구소는 이듬해 국제경제연구원으로, 1984년에는 산업연구원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77쪽)" 

 

반면 KDI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어서 조금 갸웃하게 되긴 한다. 

 

- 해방 이후 한국 경제사에 대해 몇몇 전공 서적 말고 조금 대중적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회고적 썰'들과 '엄밀한 학술 연구 성과'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책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이 책이 그 어딘가의 빈 공간을 훌륭히 메우고 있다. 경제정책의 입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 한명 한명의 삶을 통해,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한국 경제의 재건-도약-고속 성장의 단계의 중요한 단면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책의 장점이다. 그리고 역시 '썰'들이 재밌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아쉬운 점을 꼽자면 역시 김재익을 마지막으로, 1990년대 이후 경제정책 관료의 이야기들이 없다는 부분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 경제 정책 및 관료들의 역할이 이전에 비해 축소되었기 때문일까? 필자 또한 왜 최근에는 소위 스타 경제관료가 없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으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고도 성장 단계에 접어들면서 과거에 비해 성숙한 경제 구조 속에서 정부 및 개별 경제 관료들이 활동할 영역이 좁아진 것이 큰 원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관치의 영역이 적지 않은 한국 경제에서, 1990년대부터 2010년대 까지 앞 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경제 관료들과 그들의 정책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는 옛 이야기 못지 않게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다. (+ 그리고 최근 대규모 산업 정책의 부활과 더불어, 산업 경제 관료가 역량을 펼칠 공간이 다시 다소 넓어질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헌 책 말고 새 책으로 살테니 저자 혹은 누군가 다른 이의 시즌 2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  마지막으로 저자에 대해. 저자는 한국 경제사 전공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통일연구원에서 근무하고 계신다. (박사 때 전공한) 한국경제사와 (연구소에서 수행하는) 북한 경제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연구의 중심 주제로 갖고 계신데, 비슷한 포지션으로 국제무역과 일본 경제라는 두 개의 연구 주제를 가져가려고 애쓰는 내 입장에서 조금 비슷해 보인다. 그렇다면 나중에 나도 이런 단행본을 쓸 기회가 있다면, 난 무슨 책을 쓸 수 있을까 잠시 행복회로 상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