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 읽기/Social Science

칩 워 (크리스 밀러)

choijeo86 2023. 10. 3. 14:01

길었던 추석 연휴 동안 크리스 밀러의 베스트셀러 칩 워(Link)를 다 읽었다. 

 

역시 듣던대로 반도체 산업과 공급망의 형성 과정에 대해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경제학자나 경영학자도, CEO도, 반도체 공학 전공자도 아닌 역사학자인 저자가 탄탄한 문헌 조사와 수많은 인터뷰 등을 통해 이런 훌륭한 책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과 시간을 들였을지 궁금해졌다. 

 

책이 짧은 챕터들 수십개로 나뉘어져 있어서 가독성도 편했고, 각 챕터마다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한것도 뛰어났다. (생각해보니 마치 반도체 생산 공정들처럼 이렇게 일부러 챕터들을 짧게 슬라이싱한 것은 하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챕터마다 한 장 정도 분량으로 핵심만 정리하면서 읽었는데, 정리한 것을 죽 늘어놓으니 지난 40년간의 반도체 산업 역사에 대한 요약이 된 것 같다. 

 

특히 지금 하고 있는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한 학술 연구, 그리고 일본/대만 반도체 산업과 관련한 정책 연구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다보니 이들 내용을 어떻게 내 연구에 참고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 어떤 쪽으로 더 들여다 보아야 할지도 약간 느낌이 오는 것 같다. 

 

책의 감상은 이 정도이고,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소소한 포인트들은 다음과 같다.

 

- 아이폰 초기형에 삼성전자의 칩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잊어먹고 있었는데 책이 상기시켜 주었다. 몇년새 너무 당연하게 아이폰에는 TSMC의 칩이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러네. (참고로 난 불과 몇년 전까지 아주 오래된 아이폰4를 갖고 있었다.) 

 

- 마이크론이 아이다호의 감자왕 존 심플롯의 초기 투자와 과감한 경영으로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연구소에서 밥먹다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그리고 그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알아먹지를 못했는데)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 

 

- 반도체 산업에서 소련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냉전 시대 소련도 반도체 산업에 크게 투자했었다는 부분 (결국 실패했지만), 그리고 반도체 기술을 놓고 치열한 첩보전이 있었다는 부분도 새로 알게된 부분이다. 만약은 없지만, 소련의 반도체 산업이 어느 정도 자리잡아 현재의 러시아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 반도체를 둘러싼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갈등에 대해 대강 들었지만 책에서 보니 지금의 미중 무역전쟁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국가 안보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특정국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촉발된 부분이 큰 것 같고, 저자도 (약간 의도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리소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네덜란드의 ASML이 절대적 1강의 위치를 갖고 있지만 그 ASML 또한 미국, 독일 업체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부분, 그래서 반도체 공급망에서는 어떤 국가도 절대적인 '목줄'을 쥘 수 없다는 부분이 설득력 있다. 또한 반대로 이런 현재의 공급망을 무시한 채 반도체 공급망 전체의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볼 때 성공적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의도로 읽혀졌다. 

 

책에서 인상적인 문단을 몇 개 뽑는다면 다음과 같다. (원문에서 일부 요약 및 수정하였음.) 

 

"전형적인 칩의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이 소유하고 있으며 영국에 본사를 둔 ARM이라는 회사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엔지니어들이, 미국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반도체 설계도를 디자인한다. 디자인이 끝난 설계도는 대만의 설비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서는 일본에서 온 극히 순수한 실리콘 웨이퍼와 특수한 가스를 사용한다. 원자 몇 개 정도의 두께로 새기고, 배치하고, 측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공작 기계가 반도체 설계도를 웨이퍼에 그려 넣는다. 이런 장비를 제작하는 선도적인 기업은 다섯 곳으로 하나는 네덜란드, 하나는 일본, 나머지 셋은 캘리포니아에 있다. 이런 장비가 없다면 최신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제작이 불가능하다. 칩은 패키징과 테스트를 거치는데 테스트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중국으로 보내 핸드폰이나 컴퓨터 부품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38쪽)

 

"2007년 리처드 반 아타는 펜타곤의 의뢰를 받아 반도체 공급망의 세계화가 미군의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중략) 보고서는 국방부가 첨단 칩을 얻기 위해서는 머지않아 외국에 의존할 것이라고 보았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볼 때 미국의 우위가 항상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리소그래피에서 GCA는 니콘과 ASML을 능가할 수 없었고, 마이크론 외의 미국 D램 생산자들은 모두 파산했다. 트랜지스터 소형화에서 인텔과 TSMC, 삼성의 격차는 점차 줄어들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에서 선두를 지키고 있었지만 대만의 MediaTek 등 새로운 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반 아타가 볼 때 미국이 자신할 이유는 많지 않고, 안심할 근거는 없었다. 2007년 그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선두 자리는 이후 10년간 심각하게 침해당할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347쪽)

 

PS 1.

반도체 산업을 조금 더 공부하려고 여러 연구보고서들과 책들을 사고, 유튜브와 KMOOC등에서 들을 강의들을 골라 담았다. 찾아 읽어볼 책들도, 경청해야 할 강의들도 많아서 심심하지는 않아 좋다.

3주 뒤에 대만 출장을 가야 하니 다음으로 읽을 책은 (마침 시의적절하게 시중에 나온) 인치밍의 '칩 대결'(Link)이 좋을 것 같다.

 

PS 2.

반도체 수출 통제 연구를 내년 1월에 호주에서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Link

발표도 발표고 처음 가보는 호주 멜버른 구경도 즐겁겠지만, 동아시아의 공급망/GVC 관련해 최근의 좋은 학술 연구들을 많이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될 것 같아 기대가 된다. 

(+ 일본이 주도하는 ERIA가 동아시아 공급망/GVC 재편과 관련해 이런 자리들을 계속 만드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