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 읽기/Humanities

아시아 1945-1990 (폴 토마스 체임벌린)

choijeo86 2023. 12. 17. 01:57

아시아 1945-1990 (폴 토마스 체임벌린) Link

The Cold War's Killing Fields: Rethinking The Long Peace

 

0.

안타깝게도 귀한 연말 휴가 기간에 회사에서 짱돌을 맞아서, 휴가 내내 책만 읽으며 쉬기는 어렵게 됐다ㅠㅠ

그래도 휴가는 휴가니까! 난 책 읽으며 보낼테다.

 

1.

연말 휴가동안 읽을 책으로 폴 토마스 체임벌린의 '아시아 1945-1990'를 골랐다. 연구실 책장에 꽂힌 여러 벽돌 책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두께를 자랑하기에, 이런 휴가 아니면 읽기 어려울 것 같다.

 

2. 

흔히 냉전을 미국과 소련 양 초강대국의 대립에 집중해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여기에서 벗어나, 냉전 시기 가장 파멸적인 폭력의 장이었던 (남부) 아시아 변경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 시대 일어난 아시아에서의 폭력을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들 지역에서 미소 양측의 '피후원자'이자 '동맹자'들이었던 정치지도자들과 혁명가들이 단순한 '꼭두각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적극적으로 냉전 네트워크에 참여한 이들이었음을, 그리고 이들에 의해 지역에서 대규모의 충돌이 일어났고 20세기와 21세기까지 걸쳐 대대적인 지정학적 변모를 초래한 사실을 보여준다. 

 

3.

책은 이 시대 아시아에서의 대규모 폭력들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을 크게 셋으로 구분한다.

 

첫번째는 이차대전과 중국 공산화 직후 벌어진 분쟁들로 주요 전선은 한국, 그리고 인도차이나이다. 이 시대 전선의 주역들은 제국주의 이후 포스트 식민주의의 흐름에서 나온 공산주의자들이다.

두번째는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이 사이공과 맞서면서 번져나간 분쟁들로 주요 지역은 베트남,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등이다. 두번째 시대의 전선은 첫번째에 비해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옅어지고 인종과 종교적 정체성의 문제가 좀 더 도드라진다.

마지막 전선은 1975년 이후 서아시아와 중동으로 팔레스타인인, 시리아인, 이스라엘인 등 다양한 종족들이 얽혀 벌어진 레바논 내전이 그 중심 무대이다. 냉전 후기 전장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인종과 종교가 그 빈 자리를 채운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통해 책은 아시아 주요 변경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어떻게 대두했다가 몰락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종-종교 전쟁이 다시 확산되는지를 탐구한다.

 

4.

이 책을 골랐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다른 책은 정문태 기자가 자신의 전쟁 취재를 기록한 오래 전의 책(Link)이다. 대학 저학년 때 한창 한겨레21, 시사인 이런 진보 성향의 주간지들과 이 동네에서 나오는 단행본들을 꽤 읽었다. 정문태 기자의 책도 그렇게 읽었고, 그렇게 버마, 인도네시아, 라오스, 아프간,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내전, 폭력, 살육의 역사에 대해 약간 알게 되었다. (대학 2학년 때인가, 버마 민주화운동 학생 운동가들이 법대에서 작은 세미나를 한다길래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나도 보수화된 것인지 더 이상 한겨레나 시사인 같은, 소위 진보 성향의 주간지, 단행본들을 챙겨 읽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보수 성향 일간지와 주간지들을 뒤적거릴 때도 적잖으니 스스로 놀란다.)

그럼에도 아시아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분쟁과 폭력, 이들의 배경과 결과가 되는 지정학적 변화와 그 역학은 지금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여전히 관심이 많다. 그런 면에서 이 벽돌 책 "아시아 1945-1990"은, 한편으로는 대학 풋내기일 때 설익은 지적 호기심을 채우던 추억을 되새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 주요 국경 지역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분쟁과 폭력, 살육의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명저일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