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 읽기/Humanities

위험한 일본 책 (박훈)

choijeo86 2024. 3. 13. 22:20

연구실 서가에 꽂힌 '내돈내산'한 일본 책들

 

1. 일본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사모으고 있다. 특히 일본 경제/산업과 관련이 있다 싶으면 그냥 다 사고 있는 것 같다. 

 

일본 경제/산업을 연구하는데 참고할 책들은 거의 연구비로 사는데 (사실 연구소에서 일본 관련한 일을 맡지 않았다면 내가 일본에 대한 책을 살 일은 거의 없었을테니), 이건 내 개인 책으로 소장해야겠다 싶은 몇몇 책은 사비로 산다. 

 

박훈 교수님의 "위험한 일본 책"도 그렇게 최근에 내돈내산한 몇 권의 일본 책 중 하나다. 

 

2. 책은 일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일본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저자가 언론 매체들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한 편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보통 언론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들이 일관성이 떨어지기 쉽지만 저자의 필력이 좋아 매우 재밌게 읽고 있다. (저자의 서평은  '서울리뷰오브북스'에서 철 마다 잘 읽고 있기 때문에 더욱 반갑기도 하다)

 

3.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글들이 여럿이지만 특히 '우리는 일본을 경시하는 마지막 국가여야 한다'는 울림이 있다. 한국은 일본에 관심이 가장 많은 국가이지만 일본에 대한 지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에도 공감이 된다. 

 

4. 초등학생이던 1997년, 이민성 선수가 역전골을 때려박은 '도쿄대첩'  생중계를 본 기억, 온 나라가 뒤집어진 기억이 생생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일본은 그렇게 '가위바위보도 져서는 안되는 나라' '지면 돌아오지 말고 현해탄에 빠져야 하는 나라' 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 0:3으로 박살이 나도 예전 같은 타격감은 없는 것 같다. 예전과 같은 일본에 대한 양면적인 동경감과 열등감, 그리고 반일(내지는 극일) 분위기는 확실히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쿄대첩'으로 대표되는 세대와는 또 다른, 일본에 0:3으로 져도 큰 타격감이 없는 지금 우리 세대의 일본 연구는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5. 연구소에서 올해 수행할 과제를 준비하면서 한일 무역 및 투자 구조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2010년 대 초반 이후 한일 무역 규모는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종전에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크던, 제조업에서 중요한 몇몇 중간재 품목들의 대일 수입 의존도는 십여년 이상 낮아지고 있다. 혹자는 이를 한국 제조업 경쟁력의 상승, 특히 한일 무역 분쟁 이후 소부장 국산화의 성과로 국뽕을 약간 얹어 해석한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다른 한 모습을 보면 반도체, 이차전지 등 주요 첨단 전략 산업에서 중요한 소재, 부품, 장비들을 생산하는 일본 기업들이 한국에서의 생산 및 R&D 역량을 늘리는데 대규모로 투자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물론 이들 산업에서 삼성, LG, SK같은 한국 기업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래서 이들 한국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둔 일본 기업들의 대한국 투자가 증가했다고 (다시 국뽕을 살짝 얹어) 해석할 수 있고, 이도 일정 부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현상이 마냥 좋아하기만 일이기만 할 것인가, 우리 산업이나 경제에서 주의하며 보아야 할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부분은 없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일들을 연구소에서 하다 보니 박훈 교수님의 글들이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뱀발1. 책을 읽다보면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우리는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융숭히 대접하고 일본 지식인들은 심지어 하인들에게도 글을 받아갈 정도로 우대했다'는 국뽕 식으로 배웠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어떻게 보고 평가했는지에 대해서는 파편적인 몇몇 에피소드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몹시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면 이에 대한 책들도 있을 것 같은데.

 

뱀발2. 이승만의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에 대한 저자의 서평도 실려있는데, 저자는 이 책을 일본근대사 수업의 교재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명저라고 극찬하고 있다. 영화 '건국전쟁'에 대한 논쟁이 떠오르면서, 언제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대한 합리적인 공과를 우리 사회는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어쨌든, 이승만의 저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

 

뱀발3. 위 사진에서 김시덕 교수님 저 '일본인 이야기'가 2권 이후 나오지 않고 있어 매우 아쉽다ㅠ

 

뱀발4. 일본 출장 갈 때 알게 된건데, 핸드폰으로 문자에 여러 이모지들을 쓰다가, 다른 나라들은 국가 이름을 쓰면 국기들이 이모지로 나오는데 (예컨대 미국이라고 쓰면 성조기가 이모지로 뜨는), 일본이라고 적어도 이모지에 일장기가 안나와서 충격을 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런가.

 

뱀발5. 마지막.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문장을 썼다 지웠다 고쳤다 했다. 역시 '일본'은 참 어렵고 조심스러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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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문장 스크랩

 

그 동안의 분투 덕분에 요즘 젊은이들이 일본 콤플렉스가 거의 없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우리가 일본과 대등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대부분 당연한 걸 왜 묻나 하는 반응이다. 격세지감, 천지개벽이다. 그러나 나는 불안하다. 우리가 일본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아직 도전자의 자세로 일본을 더 알아야 한다. 알아도 샅샅이 알아야 한다. 일본이 무서워 하는 나라는 큰소리치는 나라가 아니다 (중략) 세계인 모두가 일본을 존경해도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동시에 세계인 모두가 일본을 무시해도 우리만은 무시해서는 안된다. (pp.145-147)

 

1910년 조선이 망한 것은 반일 감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일본을 증오하고 규탄하는 사람들은 전국에 넘쳐 흘렀고, 일본을 깔보고 멸시하는 사람들도 사방에 빽빽했다. 모자랐던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40여년간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게 우리의 운명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지금만큼 한일간의 국력 차가 좁혀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섣불리 우쭐거리는 것은 독약이다. 장차 우리가 일본을 정말 앞서는 날이 와도, 우리는 일본을 경시하는 맨 마지막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일본은 정말 경계해야 할 상대이기 때문이다. (p.156)

 

일제 치하 조선 민족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와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해 상허 이태준은 일갈했다고 한다. "주기율표대로 하라. 연금술은 반대한다" (중량) 제국 일본은 키 작은 청년 히로히토를 살아 있는 신으로 만들었고, 주체조선은 어디서 갑자기 우주 도시 같은 단군릉을 창조했다. 둘 다 연금술이었다. 그 둘의 말로와 현실을 보라. 우리의 국시는 논리와 팩트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저 둘과 다른 사회읜 것이다. 우리를 저 둘처럼 만들려는 염금술사를 경계하자 (pp. 168-169)

 

이시바시 단잔은 '자고로 어떤 민족도 타 민족의 속국이 되는 것을 유쾌하게 생각할 민족은 없다'며 일본이 식민지를 다 포기하고 무력이 아니라 무역으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일축했다.... (중략)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를 하지 않고도 '열강'과 선진국이 된 거의 유일한 나라다. 이시바시의 염원을 일본 제국은 환상이라고 코웃음 쳤지만, 대한민국은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 한국 근대사가 위대한 점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pp.172-173)